상해임시정부와 조선인들은 간토학살사건의 진상조사를 하였다!!

작성일
2020-08-08 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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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해임시정부와 조선인들은 일본 당국의 삼엄한 경비 속에서도 진상조사를 하였다.
- 경찰의 억압 속에서도 일본 시민들은 진상조사와 추도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 일본 당국은 마지못해 시민들의 추도활동을 허용하지만, 국가의 책임은 여전히 부정하고 있다.
- 한국 정부는 해방 이후 진상조사도 추도식도 계획하고 있지 않다.
- 한일재일 시민연대의 힘으로 한국과 일본의 국가책임을 강력하게 물어야 할 때





1923년, 식민지 조선과 재일동포들은 일본 당국의 감시 속에서도 진상조사를 하였다.

식민지 조선에서 그리고 일본에 있던 조선인들은 학살의 진상을 조사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였습니다. 지진이 일어난 후 조선에서는 '동경지방이재조선인구제회'가 조직되어 피해지역에 있는 조선인들을 구제하고 진상을 조사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10월에는 '관동지방이재조선동포위문반'이 조직되어 구제와 위문사업을 벌이는 한편, 학살의 진상을 조사했습니다.

상해의 [독립신문]에서도 조사활동을 벌였습니다. 그렇지만 학살의 사실을 조사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항상 일본 경관의 감시가 따라붙었고 학살을 목격한 일본인들도 침묵으로 일관했습니다. 이러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조사활동을 통해 약 6천여 명의 조선인들이 학살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학살사건 이후 곳곳에서 열린 추도모임과 딜레마

학살사건 이후 일본 시민들은 학살당한 조선인들을 추도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습니다. 추도회를 열거나 추도비, 그리고 피학살자를 묻는 묘지에 묘비 등이 세워졌습니다. 일본 당국의 방해와 지역주민들의 반발도 있었고, 학살사실을 은폐하려는 시도가 계속 되었습니다. 추도비를 세울 때에는 지역주민들과 추도비에 써 넣을 글자들을 두고 학살된 사람들이 어떤 사람인지, 학살자는 누구인지, 왜 학살되었는지 등을 새겨 넣는 일이 어려웠습니다. 진실이 밝혀지는 것을 꺼리는 이들의 반대가 많아 추도비에는 "무연고자공양회" 등의 명칭을 사용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추도비는 추도해야할 사건이 있었음을 나타내는 것이고, 추도비에 새긴 글의 내용은 해당 지역 주민들의 당시의 정치적, 지역적 상황이 어떻했는지를 알 수 있는 근거가 됩니다.


학살사건에 대한 국가책임을 부정하는 일본당국과 학살사건에 공식적 입장을 미루는 대한민국정부.

학살사건 이후 일본 시민들의 지속적인 노력으로 해마다 추도식이 열리지만 일본 총리는 사건의 축소하여 민간인들에게 그 책임을 덮어씌우더니 학살사건에 대한 역사적 입장이 다양하다는 이유로 도쿄도지사 고이케유리코는 역대 총리가 보내오던 추도사마저 보내지 않고 있습니다. 일본 극우세력과 우익정치인들의 반발에 편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면 한국정부는 왜 해방된 주권국가로서 이 사건을 진상조사를 하지 않는 것일까? 정부차원의 추도사조차 없습니다. 혹 식민지상태였으니 일본에서 일하던 조선인들을 일본 천황의 臣民으로 보기 때문일까? 아니면, 한국에서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일본에서 일어난 사건이기 때문일까? 그도 아니면 일본과 평화적(?)관계를 유지하고 싶어서일까?  혹자는 청와대가 역사인식이 없어서일까?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적어도 현 문재인 정부는 그래서는 안됩니다. 19대 국회에서 간토학살전시회를 열었을 때, 추도사와 격려사를 보내 온 분들이 대통령이 되었고, 문광부 장관이었기 때문입니다.



21대 국회에 특별법 제정을 위해 다시 한 번 시민들의 힘을 모아야

19대 국회에서 발의된 "관동대지진 조선인학살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특별법"이 본 회의에 상정되지 못해 폐안이 되고 말았습니다.  21대 국회에 돌아 온 유기홍의원과 만났습니다. 다시 특별법안을 작성하여 전달하며 이번 회기에는 반드시 통과될 수 있도록 노력해 달라는 부탁을 드렸습니다. 의회는 의회대로 국가의 한 축으로서 그 책임을 다해야 할 것이고, 그 법에 따라 정부가 조사에 착수하여 명확한 책임의 소재를 밝혀내야 할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해 다시 한 번 시민들의 힘으로 결집시키는 계기를 만들어야 할 때입니다.  (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