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설전시

관동 조선인학살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 기획전

간토 코리안 제노사이드와
국가 그리고 민중

제 3부
이루지 못한 조사와 추도

은폐되어버린 학살

隠蔽されたままの虐殺

―일본 정부는 책임을 지지 않았다―

-果たされぬ日本政府の責任-

관헌은 “불령선인”이 있다고 믿어 “폭동” 유언비어를 퍼뜨렸고 스스로도 조선인들을 살해하고 그 책임문제를 회피하기 위해 여러 가지 선후책을 강구했습니다. 하나는 조선인들의 불령행위가 실제로 있었다는 사실을 찾아내 발표, 선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조선인이 집단으로 일본인을 습격했다는 사실은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또 하나는 단 몇 건의 자경단 사건만을 재판에 회부하며 경찰과 군대의 학살을 불문에 부쳤습니다. 유골도 증거가 된다는 이유로 숨기거나 처분했습니다. 진재 후 제국회의에서 두 명의 의원(다부치 토요키치(田淵豊吉), 나가이 류타로(永井柳太郎))이 조선인 학살사건에 대해 정부의 책임문제를 제기했으나 정부는 “조사 중”이라고 답한 채 지금껏 방치하고 있습니다.

官憲は「不逞鮮人」がいるものと信じ、「暴動」流言をながし、自らも朝鮮人を殺害しました。その責任問題を回避するため彼らは様々な善後策を講じました。一つは、朝鮮人による不逞行為が実際にあったという事実を探し、発表・宣伝することでした。しかし、朝鮮人が集団で日本人を襲ったような事実は発見できませんでした。
もう一つは、わずかな自警団事件のみ裁判にかけ、警察や軍隊の虐殺を不問にすることでした。遺骨も証拠になるため隠され、処分されたのです。 震災後の帝国議会で、2人の議員(田淵豊吉、永井柳太郎)が朝鮮人虐殺事件について国の責任を問いましたが、政府は「調査中」と答えたまま、現在まで放置しています。

琴秉洞 편 『朝鮮人虐殺関連官庁史料』에 수록
9월 5일 정부의 치안담당자가 모여 학살사건에 대해 관헌이 취해야할 대외적태도를 논의했다. “조선인의 폭행(미수)을 적극수사하여 사실화시키도록 노력할 것” 등 “조선인의 범죄” 날조 등의 방침이 세워졌다.

琴秉洞編『朝鮮人虐殺関連官庁史料』所収。
9月5日政府の治安担当者があつまり、外部に対し、虐殺事件について官憲のとるべき態度を打ち合わせた。「朝鮮人の暴行(未遂)を極力捜査し、肯定に努めること」など、「朝鮮人の犯罪」捏造などが方針化された。

나가이 류타로
永井柳太郎  
同『永井柳太郎』編纂会『永井柳太郎』所収

다부치 토요키치
田淵豊吉小山仁示編
『田淵豊吉議会演説集1』所収

11월 14일 『報知新聞』
도쿄 아라카와 방수로에 있는 요쓰기 다리 왼쪽 밑에 있었던 조선인들의 시체는 가메이도(亀戸) 사건 희생자들의 시체와 같은 장소에 버렸다고 가메이도 경찰서장이 진술했기 때문에 예외적으로 보도되었다. 가메이도 사건의 유족들이 현장에 가려고 하자 경찰들이 두 번이나 유해를 파 내 어디론가 가져가 버렸다.

11月 14日『報知新聞』
東京・荒川放水路の四ツ木橋下手にあった朝鮮人遺体は、亀戸事件犠牲者の遺体も同じ場所に遺棄したと亀戸警察署長が述べたため、例外的に報道された。亀戸事件遺族らが現場に行こうとすると、二度警察の手で掘り出され、遺骨はどこかに運び去られた。


이루지 못한 조사와 추도

叶わなかった調査と追悼

진재 후 조선인 청년들은 “재일본간토지방이재동포위문반”이라는 이름으로 간토지역 일대를 조사했습니다. 그러나 일본 정부가 조사를 방해하고 시체를 숨기기까지 하여 제대로 조사할 수 없었습니다. 연구 현황으로는 희생자 수천 명이라고 밖에 할 수 없습니다. 진재피해가 적었던 곳에서 자경단 재판이 열린 경우에도 학살당한 사람의 이름을 알 수 없었던 것이 당시의 상황이었습니다.

震災後、朝鮮人青年らは「在日本関東地方罹災同胞慰問班」という名前で、関東一帯を調査しました。しかし、この調査は日本政府の妨害や遺体隠し等により、困難をきわめました。現在の研究では、犠牲者数は数千人としか言えません。震災被害の少なかった場所で自警団裁判になった場合でも、虐殺された人の名前がわからないのが当時の状況でした。

진재로 소실된 구 회관 앞에 모인 기독교 청년회(YMCA) 회원들. 앞줄 왼쪽에서 두 번째가 해방 후 『極熊筆耕』등으로 위문반 조사를 발표한 최승만 (자료소장: 재일본한국YMCA 2・8독립선언기념자료실)

震災で焼失した旧会館前に集まった基督教青年会会員。前列左から2番目が戦後『極熊筆耕』 等で慰問班の調査を発表した崔承萬(写真所蔵:在日本韓国YMCA2・8独立宣言記念資料室)

중국 샹하이의 대한민국임시정부기관지 『독립신문』. 1923년 12월 5일, 조사한 희생자 수를 게재하였다.
中国上海の大韓民国臨時政府 機関紙 『独立新聞』1923年 12月 5日。調査した犠牲者 数を掲載している。
1924년 9월 14일 동경일일신문
1924年 9月 14日 『東京日日新聞』
1924년 8월 15일 동경일일신문 (사이타마판)
1924 年8 月15 日『東京日日新聞』(埼玉版)

진재 후 학살당한 조선인들을 추도하려는 움직임이 각지에서 일어나 추도회가 열리거나 비, 묘지 등이 만들어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경찰의 방해와 지역주민의 반발, 은폐시도가 계속되는 가운데 학살의 진실을 밝혀내기는 어려워 “무연고자 공양회” 등의 명칭을 사용할 수 밖에없었다.

震災後、虐殺された朝鮮人を追悼する動きは各地で起こり、追悼会が行われたり、墓や碑が建立されたりしています。しかし、警察による妨害や地域
住民からの反発や隠蔽の動きの中、虐殺の主旨を明らかにすることは困難で、「無縁仏の供養会」などの名称を使わざるを得ませんでした。


유족 김도임(金道任) – 세 아이들과 아내를 남기고

金道任さん( キム・ドイム:東京在住 )- 幼子 3人と妻を遺して

간토대진재는 내가 태어나기 13년 전의 일입니다. 그 때 외삼촌 박덕수도 희생되었습니다. 그는 군마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진재 후 도쿄에 갔습니다. 동향 사람들이 위험하다며 말렸지만 당시 33살의 젊은 외삼촌은 “일본어도 잘 하고 길도 잘 알아”라고 하며 길을 나서서는 그 후 소식이 끊겼습니다.
고향에는 딸 하나와 아들 둘, 그리고 28살의 아내가 남겨졌습니다. 외삼촌은 어머니보다 10살 많았는데 16살에 시집간 제 어머니를 아주 예뻐했다고 합니다. 어머니도 오빠인 덕수 외삼촌을 매우 존경했습니다. 어머니는 충격으로 병상에 누워 모유도 나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조선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살해당했으니 얼마나 분하고 한스러웠겠습니까. 저도 해마다 9월 전후가 되면 악몽에 시달렸습니다. 아버지를 잃은 사촌들은 고향의 어머니 무덤 옆에 아버지 박덕수의 위령비를 세웠습니다. 외삼촌의 둘째 아들은 진재가 일어나던 해에 태어나 아버지를 기억하지 못합니다. 80살에 죽었는데 희생자 발굴조사에 헌금하거나 답사에 참가하기도 했습니다. 저도 조사연구나 추도에 관여하는 일본사람들과 만나 마음을 위로 받을 수 있었습니다.
재일교포 4세인 손자들도 일본에서 살고 있습니다. 일본이 좋은 길로 나아갈 수 있도록 그리고 다시는 끔찍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바라지 마지 않습니다.

関東大震災は私の生まれる13 年前の出来事です。この時、母の兄・朴徳守も犠牲になりました。 伯父は群馬で仕事をしていましたが、震災後、東京に向かいました。同郷の方々は危険だと止めてくれましたが、33才の伯父は「日本語も、地理もわかる」と出かけ、その後消息が途絶えました。
故郷には、女児と男児2人の幼子と28才の妻が遺されました。伯父は母の10才年上で、16才で嫁いだ母をとても大事に思ってくれていました。母も兄・徳守をとても尊敬していました。母はショックで病床に伏し、母乳も止まったそうです。朝鮮人ということだけで殺され、どんなにか悔しく、心残りだったことでしょう。私も毎年9月前後になると悪夢にうなされました。遺児である従兄たちは、故郷の母のお墓の隣に父・朴徳守の慰霊碑を建てました。下の従兄は、震災の年に生まれ、父の記憶がありません。80才で亡くなりましたが、犠牲者の試掘調査に献金したり、フィールドワークに参加したりしていました。私も調査研究や追悼をする日本人と出会い、少しずつ心が慰められました。 在日4世である孫たちも、日本で暮らしています。日本が良い方向に向かうよう、恐ろしいことが二度と起きないよう、願ってやみません。

남겨진 가족들에게 남은 단 한 장의 사진, 가운데가 박덕수 씨(朴德守)
遺族のもとに一枚だけ残された写真。中央が朴徳守さん。

어머니 박귀순(朴貴順)
母:朴貴順(パク・キスン)

김도임 씨(가운데)와 두 명의 언니
金道任さん(中央)と2人の姉


유족 김대원(金大元) – 소식도 모른 채 유골도 돌아오지 않는다.

金大元さん(キム・デウォン 全羅南道 木浦在住): – 消息も知らされず、遺骨も帰らず

김대원 씨의 큰아버지 김광진(金光振) 씨는 간토대진재 때 돌아가셨습니다. 어디서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학살 희생자인지 아닌지조차 알 수 없습니다.
유골도 돌아오지 않았고 소식도 듣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의당 해야 할 조사와 유족에게로의 통지가 전혀 없었다는 말입니다.

金大元さんの父の兄(キム・グヮンジン)・金光振さんは、関東大震災の時に亡くなりました。どこでどのようにして亡くなったのか、虐殺の犠牲者か否かもわかっていません。遺骨も帰らず消息も知らされていません。本来行われるべき調査と遺族への通知が、まったくなされていないということです。

(김대원 씨(金大元) : 전라남도 목포 재주)
墓前での金大元氏
묘 앞에서 김대원 씨, 이공기 씨 묘 앞에서 제사
李共基氏の墓前でのチェサ

김대원 씨는 이름이 적혀 있는 한 장의 종이를 우리들에게 보여 주며 “오늘 이 사람들의 무덤을 둘러보겠습니다. 어느 무덤에도 뼈는 묻혀있지 않습니다. 아니 뼈는커녕 어디서 죽었는지 학살당했는지 아닌지조차 알 수 없습니다.”라고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일가족 중 가장 먼저 일본으로 건너 간 김동진(金東振)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도쿄 아사쿠사바시(浅草橋)에서 옷 봉제기술을 배워 먹고 살게 되자 고향 마을로부터 집안 남자 4 명을 불러 들였습니다. 그런데 진재 때 아사쿠사바시에서 일본인에게 습격을 당해 동진 씨만 겨우 목숨을 부지하여 조선으로 돌아갔다고 합니다.
동진 씨는 “일본사람들은 참혹한 짓을 저질렀다. 잔인하게 죽였다. 죽창으로 찔러 죽이고 칼로 베어 죽이고 톱으로 토막내 죽이고” “분하다 분해”라며 자주 얘기했다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이공기 씨(李共基)의 무덤 앞에서 제사를 지냈습니다. 이공기 씨는 3형제가 같이 일본으로 건너 간 후 오랫동안 소식을 알 수 없었습니다. 김대원 씨가 호적을 띄어 보자 1923년 9월 1일 오후 8시 사망, 그의 두 남동생도 같은 시각에 사망한 것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김대원 씨가 마지막으로 “오늘 일본인을 포함해 묘지를 같이 돌아보고 모두의 마음을 느낄 수 있었기에 정말 내일 죽는다 해도 한이 없습니다…역사는 천 년, 아니 그보다 더 오랜 시간이 흘러도 지워지지 않습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절대 포기하지 말고 힘써 나갑시다”라고 말했습니다.

金大元さんは一枚の名前が書かれた紙を私たちに見せてくれました。「今日、この人たちの墓を回ります。どの墓にも骨は埋まっていません。それどころかどこで死んだのか、虐殺されたのか分からないのです。」と話し始めました。
一族の中に、日本に最初に行った金東珍さんという人がいました。彼は東京の浅草橋で洋服の縫製技術を身につけ、暮らせるようになったので村から一族の4人の男性を呼び寄せました。ところが、浅草橋で震災にあい日本人から襲撃を受けました。東珍さんだけは、命からがら朝鮮の家に戻ってきたそうです。
東珍さんは、「日本人は惨いことをした。無残な殺し方をした。竹槍で突いて殺したり、刀で斬って殺したり、のこぎりでバラバラにしたり」「悔しい、悔しい」とよく言っていたそうです。
最後に、李共基さんのお墓で追悼チェサをしました。李さんは兄弟3人で日本に行き、長い間消息が分かりませんでした。金大元さんが町役場で戸籍を取り寄せてみると、1923年9月1日午後8時死亡となっており、弟さん2人も同じ日、同時刻に死亡となっているのがわかりました。金大元さんが最後に「今日、日本人を含めお墓を一緒にめぐって、みんなの気持ちや心に触れることができ、本当に明日死んでも悔いはないと思いました。 …歴史は1000年もそれ以上も消えるものではありません。時間をかけても、絶対あきらめず、取り組んでいきましょう。」と語られました。(山本すみ子「第4回 関東大震災朝鮮人虐殺 真相究明のための国際シンポジウム(2009 年)に参加して」よ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