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설전시

관동 조선인학살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 기획전

간토 코리안 제노사이드와
국가 그리고 민중

제 1부
학살의 시작
계엄령만 없었더라면

인사말

“한국병합” 100년째 되는 해(2010년)을 보내며, 한일간 평화의 싹은 올바른 역사 청산을 밑거름으로 삼아야 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일제하에서 자행된 일본의 범죄행위 중 가장 잔혹했던 1923년 관동 재일코리아 학살사건의 역사적 이해를 공유하는 것을 그 출발점으로 삼으려고 합니다.

일본의 조선침략과 식민지 지배는 당시 조선사람들의 몸과 마음에 큰 상처를 입혔습니다. 또한 피해자들에 대한 전후보상 등의 책임은 이행되지 않은 채 재일코리언들에 대한 제도적, 사회적 차별이 일본사회에서 재생산되고 있는 등 근대 한일관계에 그 뿌리를 둔 과제는 아직도 해결되지 않고 있습니다. 1923년 간토대진재 당시에 학살된 한국(조선)인들은 거의 이름조차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한국(조선)에서는 누가 죽었는지조차 알 수 없었으며, 소문으로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어도 유골하나 고향으로 돌아온 일이 없었습니다. 이는 일본국가가 유언비어와 학살에 주체적으로 관여했다는 사실을 철저하게 은폐하였기 때문이고, 대한민국 정부도 단 한차례의 진상조사조차 하지 않으며 철저히 외면했기 떄문입니다.

일본의 민중들도 정부가 퍼뜨린 유언비어를 사실로 받아들이고 천인공노할 잔인한 학살을 자행한 것은 일본국가가 노린 국가주의에 세뇌당한 결과였습니다. 1923년에 자행된 한국(조선)인 학살은 일본의 폭력적 조선지배를 상징하는 사건임과 동시에 지금과 해결되지 않은 사건이기도 합니다. “재일한인역사자료관”과 “1923간토한일재일시민연대”, “국개책임을 묻는 모임”에서 공동으로 기획한 이번전시는 사건의 시간적 흐름과 전개과정 그리고 각 지역의 구체적 상황을 생각하며, 조선인 학살의 실태와 학살이 은폐된 과정을 담았습니다. 그리고 체험자, 유족들의 증언과 해방 후 시민들의 학살에 대한 진실 규명과 추도 운동도 같이 다루었으며, 1923년부터 지금까지의 큰 흐름을 다룬 한국에서의 첫 전시입니다.

우리들은 일본정부가 조선인 학살의 책임을 인정하고 진상을 규명하지 않고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한국정부는 조속히 진상규명을 위한 조사에 나서야 할 것입니다. 전시를 보신 분들이 이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고 피해자 유족의 입장에서 조선인 학살 문제의 해결, 나아가 전후보상문제 해결에 대해 함께 생각할 수 있는 하나의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



在日韓国歴史資料館(在日)
1923간토한일재일시민연대(한국)
국가책임을 묻는 모임(일본)


머리말

간토대진재 때의 조선인 학살은 왜 일어 났을까요. 일반적으로는 조선인들에 대한 차별과 공포를 배경으로 “혼란 속에서” 민중과 군대, 경찰이 “불령선인”이라는 유언비어에 휘둘려 조선인들을 학살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관헌이 유언비어를 사실로 간주해 무선을 비롯한 통신수단을 이용해 조선인들을 경계하도록 지시하며 민중들을 무장시켰습니다. 또한 군대와 경찰이 그들의 손으로 직접 조선인들을 학살했습니다. 그리고 학살이 확대되어 가는 가운데 일본 정부는 책임 추궁을 두려워하여 민중에게만 책임을 씌우고는 사건을 은폐하려 했습니다.
우리들은 일본정부가 이 사건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한 것이 조선인 학살 사건의 결정적 요인이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번 전시는 이를 구체적으로 밝혀내는 것에 중점을 두고 기획되었습니다.

용어정리

간토(関東) – 도쿄를 중심으로 한 일본의 동쪽지역 (관동은 일본지명을 한국식으로 읽은 것)
간토조선인 학살 – 여기서 ‘조선’은 해방 이전의 조선을 말한다.
간토코리안제노사이드 – 1923년 간토조선인학살사건의 세계사적 정리를 위해 간토코리안제노사이드로 정리하였다.
불령선인(不逞鮮人) – 불령(不逞)은 불평, 불만을 품고 사회적 불안을 조성하며 제 멋대로 행동한다는 뜻으로, 조선인에 대한 멸시와 차별적 호칭으로 쓰였다.


지진발생과 조선인들에 대한 공포, 경계

地震発生と朝鮮人への恐怖・警戒

-경찰, 군대, 민중이 확산시킨 유언비어

警察・軍隊・民衆が拡げた流言

1923년 9월 1일 오전 11시 58분, 가나가와현 사가미하라(神奈川県相模原)만에서 매그니튜드 7.9의 지진이 일어났습니다. 지바현(千葉県)에서 시즈오카현(静岡県)에 걸친 광범위한 지역에서 막대한 피해를 입었습니다. 건물의 붕괴나 화재 등으로 인한 사상자 및 행방불명자는 10만 5천명이라고도 일컬어집니다. 도쿄(東京)와 요코하마(横浜)에서는 오전부터 “조선인들이 불을 지른다” 등의 유언비어가 퍼졌습니다. 유언비어의 확대에 적극적인 역할을 한 것은 경찰, 행정 등을 관할하고 있던 내무성이었습니다. 내무성은 2일 오후 해군의 무선송신소에 전령을 보내 조선인들이 “불령”스러운 짓을 하고 있다는 내용을 이튿날 전국으로 타전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같은 날 사이타마현(埼玉県)을 통해 관할 행정구역에 조선인들을 경계하도록 지시하였습니다. 일본 정부가 유언비어를 선전하여 각 지역에 자경단이 조직되었다는 사실이 명백히 밝혀졌습니다.

1923 年9 月1 日午前11 時58 分、神奈川県相模湾でマグニチュード7.9 の地震が起こりました。千葉県から静岡県にかけての広い範囲に甚大な被害をおよぼしました。建物の倒壊や火災等による死者・行方不明者は、10 万5 千人ともいわれています。 午後から東京や横浜では、「朝鮮人が放火する」などの流言が飛んでいます。流言の拡大に積極的な役割を果たしたのは、警察や行政などを管轄していた内務省でした。2 日午後に海軍の無線送信所に伝令を送り、翌朝全国に朝鮮人が「不逞」を働いていると打電させました。同日、埼玉県を通じて市町村に朝鮮人への警戒を呼びかける指示を出し、流言は政府により宣伝され、各地に自警団が組織されたことが明らかになっています。

9월 3일 아침에 후나바시(船橋) 해군 무선송신소로부터 전국의 현지사 앞으로 타전된 전문
내무성 경보국장이 해군 기지 구레친쥬후(呉鎮守府) 부관에게 타전, 각 지방 장관에게 송신 도쿄 부근의 진재를 이용하여 조선인들 중 각지에 불을 지르고 불령의 목적을 이루고자 현재 도쿄 시내에서 폭탄을 소지하고 석유를 뿌리고 불을 지르는 자들이 있다. 이미 도쿄부 일부에는 계엄령이 시행되어 각지에서 세밀히 시찰하여 선인(鮮人)들의 행동을 엄밀히 단속하고 있다. 나는 미타(三田) 경찰서장에게 묻는다. 9월 2일 밤 “××이 습격해 온다는 전보와 주의사항을 귀하의 부하에게 받은 우리들이 자경단을 조직했을 때 “××을 보면 본서로 끌고 오라. 저항한다면 ○해도 상관없다”라고 친절하게도 귀하에게 들었다. 그 한 마디는 잠꼬대였는가. 아니면 증거가 없다는 것을 구실삼아 기억이 없다고 부정하는 것인가. 어떠한가(시코쿠마치(四国町)자경단의 한 사람)

9 月3 日朝に海軍の船橋無線送信所から全国の県知事宛の電文 [ 電文の内容]
呉鎮(守府)副官宛打電 各地方長官宛 九月三日午前八時十五分了解 内務省警保局長出 東京附近の₩を利用し、朝鮮人は各地に放火し不逞の目的を遂行せんとし、現に東京市内に於て爆弾を所持し石油を注ぎて放火するものあり 既に東京府下には、一部戒厳令を施行したるが故に、各地に於て充分周密なる視察を加へ、鮮人の行動に対しては厳密なる取締を加へられたし
경찰이 민중에게 ×× (선인) 이 습격해 온다는 유언비어를 뿌리고 다녔다는 것을 보여주는 기사 『東京日日新聞』1923년 10월 23일자

警察が民衆に××(鮮人)襲来という流言を振りまいていたことを示す記事。『東京日日新聞』1923 年10 月23 日付
미야타케 가이코쓰(宮武外骨)가 그린 유언비어의 이미지. 왼쪽은 폭탄과 권총을 숨긴 사회주의자 부부. 오른쪽은 임신부 시늉을 하며 배 안에 폭탄을 숨기고 있는 조선인 여성.

宮武外骨が描いた流言のイメージ。左側は爆弾とピストルを隠した社会主義者の夫婦。右側は妊婦の振りをして腹に爆弾を隠し持った朝鮮人妊婦。

학살은 도쿄와 요코하마로부터 시작되었다

虐殺は東京・横浜から始まった

일본 정부는 9월 2일에 계엄령을 시행하였고 그 후 점차 그 대상지역을 확대해 나갔습니다. 계엄령은 치안 확보가 목적이기 때문에 군대가 그 역할을 맡았습니다. 계엄령 하에서 실탄을 장비하고 도쿄에 들어온 것은 지바현에 주둔하고 있던 기병과 중포병 연대였습니다. 그들은 경관, 민중들과 하나가 되어 “조선인 사냥”에 분주히 뛰어다녔습니다. 이러한 움직임이 유언비어를 한층 더 사실로 인식시켰습니다. 그리고 배타적인 움직임은 한 순간에 고조되어 갔습니다.

계엄령 시행 당시 경비할당구역을 그려 넣은 지도. 고노에(近衛)사단과 제1사단이 분담. 진재 직후부터 군대는 치안대책을 위해 출동했습니다. 계엄령은 2일 현재 도쿄 23구의 대부분의 지역에서 시행되었고 3일에는 도쿄 전역과 가나가와현, 4일에는 지바현과 사이타마현으로 확대되었습니다. 이 때의 계엄령은 관련조문 중 일부를 시행하여 집회와 언론의 제한, 검문소의 설치, 가택수색 검사, 위험하다고 판단되는 물품의 압수 등 군대에게 강력한 권한을 부여하는 것이었습니다. 계엄령은 진재의 혼란 수습과 치안 유지를 위해 시행되었다고 하나, 학살은 바로 이 계엄령 하에서 자행되었습니다.

政府は、9 月2 日に戒厳令を施行し、その後順次、戒厳地域を拡大しました。戒厳令は治安の確保が目的であり、軍隊がその役割を担いました。 戒厳令の下、実弾装備で東京に乗り込んだのは、千葉県に駐屯していた騎兵と重砲兵の連隊でした。彼らは警官や民衆と一緒になって「朝鮮人狩り」に奔走しました。 こうした動きが、流言にいっそうの真実味を与えました。そして、排外的な動きは一挙に高まっていったのです。

아래위 모두 松尾章一감수『関東大震災政府陸海軍関係史料Ⅰ』에 수록
戒厳令施行当時の警備の割り当てを示した地図。近衛師団と第一師団が分担。
계엄령의 조문
文条の令厳戒
자경단. 군복을 입고 있는 사람은 재향군인
自警団。軍服を着ているのは在郷軍人。
제국호텔 앞의 병사와 자경단. 위 사진 2장 모두 姜徳相・琴秉洞편 『現代史資料6 関東大震災と朝鮮人』에 수록
帝国ホテル前の兵士と自警団.
학살에 가담한 기병연대가 주둔했던 나라시노(習志野). 滝口昭二『目で見る習志野・八千代の100年』
가장 앞쪽에 台자 모양의 땅에 세워져 있는 것이 육군병원, 그 건너편에 13, 14, 15,16연대의 병사가 늘어져 있다. 기병연대의 병사였던 엣츄야 리이치(越中谷利一)는 실탄 60발을 휴대한 전시 장비로 “적은 제도(帝都, 도쿄)에 있다”라고 하며 지바카이도(千葉街道)를 말을 타고 달려 갔다고 회상했다

요코하마 – 학살조사 횟수와 증언

横浜-虐殺調査数と証言

・ 지도 내 ○안의 숫자는 학살된 시체의 조사 횟수㈜
・ A~Q는 증언이 남아 있는 장소. 증언은 발췌. 원문 그대로.
・ 초등학교 이름은 진재관련 작문이 남아 있는 학교
・ 지역 내 회색 칠한 곳은 화재소실지역

・ 地図中の○内の数字は虐殺死体の調査数(注)
・ A~Qは証言が残る場所。証言は抜粋。原文のママ
・ 小学校名は震災作文が残っている学校。
・ 地図中の * は火災焼失地域。

㈜재일본간토지방이재동포위문반이 조사한 중간조사보고. 지도는 『横浜新地図』(1923년), 『横浜大地図』(대지진화재구역)로 작성
참고문헌 横浜市役所編纂係『横浜市震災誌』요코하마시중앙도서관, 인터넷 공개 / 長岡熊雄 편『横浜地方裁判所震災略記』 / 琴秉洞 편『関東大震災朝鮮人虐殺問題関連史料Ⅰ』
이시카와심상소학교 진재작문(요코하마개항자료관 공개)

A <나마무기(生麦), 쓰루미(鶴見)>
나마무기에서 쓰루미로 향했다. 이 동네의 장정들도 칼이나 죽창을 들고 돌아다니고 있다. 길 옆에서 참살된 시체 5, 6구를 봤다. 너무나 잔혹한 살해 방법이었기에 글로 남기는 것도 싫다
(나가오카 쿠마오(長岡熊雄) 판사)

A <生麦・鶴見>
生麦から鶴見へ行く。此辺の壯丁も抜刀又は竹槍を携へて往来して居る。路傍に惨殺された死体五六を見た。余り残酷なる殺害方法なので筆にするのも嫌だ。(長岡熊雄 判事)

B <히가시카나가와(東神奈川)>
(3일) 한 마을을 지날 때마다 검문을 당하며 요코하마에서 도카이도(東海道)로 나온 기자는 걸어서 도쿄에 가기로 마음 먹고 기마병들이 어지럽게 달려간 길을 한발씩 걸어간다. 경계가 엄중하여 도로에는 약 100m마다 청년단, 소방대, 국수회원 등이 긴 칼, 작은 총, 창을 들고는 검문소를 차리고 있다. 히가시카나가와에 도착했을 때 3명의 ○○(선인)이 기병대에게 무자비하게 내몰려 도로로 튀어 나왔는데 바로 직후 ○○(살해)당하고 말았다.
<시오자와 모토하루(塩澤元治)『大阪時事新報』1923. 9. 6>

B <東神奈川>
(3 日)横濱を1町毎に誰何されつつ東海道に出た記者は 徒歩で東京に行くことを決心し 騎馬兵が駈け散らして行く街路を一歩宛進んだ 警戒が厳重で道路1 町毎に青年団消防隊国粋会員等が長刀短銃と槍を提げて関所を設けて居る 東神奈川に著くと三名の○○(鮮人)が騎兵隊に追いまくられて道路に飛びだしたので忽ち○(殺)されてしまった。<塩澤元治 大阪時事新報1923.9.6>

C <가나가와 구리타야(神奈川栗田谷)>

C <神奈川栗田谷>

D <가나가와 소리마치(神奈川反町)>
(2일) 밤 10시 넘었을 때쯤부터 각 방면에서 총성과 함성이 들려오기 시작하고 제등의 불이 수없이 벌판을 날고 있다. 때때로 무장한 청년의 전령이 달려 와서 “주의하십시오. 지금 수상한 사람 수십 명이 이 쪽으로 들어온 흔적이 있습니다”등…이날 밤 선인 17, 18명이 소리마치 유곽 뒤쪽에서 참살당했다.(야기 쿠마지로(八木熊次郎「関東大震災日記」)

D <神奈川反町>
(2日) 夜ノ十時過頃カラ各方面デ銃声ト喊声ガ聞エ始メ提灯ノ火ガ幾ツトナク野原ヲ
飛ンデイル。折々武装シタ青年ノ傳令ガ駆ッテ来テ「御注意ヲ願ヒマス只今怪シイモノ
ガ数十名此ノ方面ヘ這入ッタ形跡ガアリマス」等・・・此夜鮮人十七八名反町遊郭ノ裏デ
惨殺サレタ。(八木熊次郎「関東大震災日記」)

E <다카시마쵸(高島町)>

E <高島町>

F <요코하마 역 앞>

F <横浜駅前>

G <가나카와현립 제1중학교 부근>

G <神奈川県立第一中学校隣接>

H <구보야마(久保山)>
전봇대에 밧줄로 손이 뒤로 묶인 조선인의 시체를 목격했다. 피범벅이었다. 가족들은 말없이 지나쳤다. 그 후 가족들 중 이 날의 일을 입밖에 꺼내는 일은 없었다.( 당시 초등학교 2학년, 『朝日新聞』1993.8.31)

H<구보야마(久保山)>
전봇대에 밧줄로 손이 뒤로 묶인 조선인의 시체를 목격했다. 피범벅이었다. 가족들은 말없이 지나쳤다. 그 후 가족들 중 이 날의 일을 입밖에 꺼내는 일은 없었다.( 당시 초등학교 2학년, 『朝日新聞』1993.8.31)

I <스이도야마(水道山)>

I <水道山>

J <미나미오타(南太田)>

J <南太田>

K <고토부키(壽)경찰서>

K <壽警察署>

L <고토부키쵸(壽町) 인근 산>

L <壽町付近の山>

M <헤라쿠(平楽)요코하마식목회사 부근, 이시카와(石川)부근>

M <平楽 横浜植木会社付近、石川付近>

N <나카무라쵸(中村町)>
무엇보다 백주 대낮의 살인극이었으니까요…전봇대에 쇠줄로 묶고는 때리고 차고 목공용 쇠갈고리로 머리에 구멍을 내고…그 중에서도 강에 뛰어 든 조선인을 쫓아 일본인이 배로 쫓아가는 광경…수면 위로 얼굴을 내밀 수 있었던 조선인은 반도 안 되었어요. 일본인들은…전속력으로 돌진하기 시작했어요…조선인들의 머리를 노리고 쇠갈고리가 날아가 푹 하는 소리와 함께 피가 뿜어져 나와 그 일대는 새빨갛게 물들어 갔다. 그래도 성이 차지 않은지 쇠갈고리로 조선인들을 찍어서는 배 쪽으로 질질 끌고 와서 칼로 베어 버렸다…살점이 뜯어져 나와 이미 사람 얼굴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미타 켄지로(美田賢二郎)자영업 『潮』184호)

N <中村町> 

 なにしろ天下晴れての人殺しですからねえ。・・・電柱に針金で縛り付け、殴る蹴る、鳶で頭に穴をあける・・・その中でも、川に飛び込んだ朝鮮人を追って、日本人が舟で追う光景・・・朝鮮人が水面に顔を出したのは五分もたってからです。日本人は・・・全速力で突進を開始した・・・朝鮮人の頭めがけて鳶が飛ぶ。ブスという音と共に血が噴き出し、みるみるあたりは真っ赤に染まっていく。それでも気がすまないのか 鳶で引っ掛けた朝鮮人をズルズルと舟に引き寄せると刀で斬りつける・・・肉がはじけ飛び、すでに人間の顔の形をとどめていない。(美田賢二郎 自営業『潮』 184 号)

O <이소고(磯子) 부근>
조선인들이 도망갔기 때문에 어른들은 모두 쇠막대기를 들고 조선인 정벌에 나섰습니다. 그리고는 감옥 간수들은 총으로 쏘거나 쇠막대기로 조선인들을 굴려서는 감옥 앞의 바다에서 떠내려 보냈습니다. (스가타니 이사(菅谷イサ) 이소고초등학교 5학년)

O <磯子付近>
ちょうせんじんがにげたので、みんなおとなのひとは、てつのぼうをもっ
て ちょうせんせいばつにいきました。それから かんごくのかんしたちは
みんなぺすとでつたり、てつのぼうでころしたり、それからその ころし
たちょうせんをかんごくまえのうみへながしました。
(菅渓イサ 磯子小学校5 年)

P <네기시 호리와리 강(根岸掘割川) 야와타(八幡)다리 부근>

P <根岸 堀割川 八幡橋付近>

Q <혼모쿠(本牧)>
㈜재일본간토지방이재동포위문반이 조사한 중간조사보고
※ 지도는 『横浜新地図』(1923년), 『横浜大地図』(대지진화재구역)로 작성
[참고문헌]
・ 横浜市役所編纂係『横浜市震災誌』 요코하마시중앙도서관, 인터넷 공개
・ 長岡熊雄 편『横浜地方裁判所震災略記』
・ 琴秉洞 편『関東大震災朝鮮人虐殺問題関連史料Ⅰ』
・ 이시카와심상소학교 진재작문(요코하마개항자료관 공개)

Q <本牧>
(注)在日本関東地方罹災同胞慰問班調査の中間調査報告
※地図は「横浜新地図」(1923 年)「横浜大地図(大震火災区域)」より作成
[参考文献]
・ 横浜市役所編纂係『横浜市震災誌』(横浜市中央図書館。ネットに公開)
・ 長岡熊夫編『横浜地方裁判所震災略記』
・ 琴秉洞編『関東大震災朝鮮人虐殺問題関係史料Ⅰ』
・ 石川尋常小学校震災作文(横浜開港資料館公開)


사이타마에서는 이첩(移牒)으로 민중을 조직화

埼玉では 移牒により民衆を組織化

사이타마현 내무부장은 2일 밤, 도쿄에서 “불령선인의 맹동(盲動)”이 있으니 현내 각 행정구역 당국자들은 “유사 시 적당한 방책을 취하도록”이라는 내용을 전화로 이첩하였습니다.
이튿날부터 현내 각 지역에서 자경단이 결성되었습니다. 현 남쪽으로는 조선인을 포함한 피난민들이 속속들이 들어오고 있었습니다. 경찰은 조선인들을 검속하여 나카센도(中仙道)를 통해 군마현(群馬県) 방면으로 보냈습니다. 그들이 현 북쪽에 도달한 4일 밤을 중심으로 자경단과 군중들에게 습격당하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희생자는 구마가야(熊谷)57명, 혼죠(本庄)88명, 진보바라(神保原)42명, 현 전체로는 200여명에 달했습니다. 민중들이 조선인을 수용하는 경찰서를 습격하여 혼죠에서는 군대의 힘으로 그들을 막을 정도였습니다.

埼玉県内務部長は2日夜、東京で「不逞鮮人の盲動」があるとし、町村当局 者は「一朝有事の場合適当な方策をとるように」と電話で移牒しました。
翌日から県下で自警団が結成されました。県南部に、朝鮮人も含む避難民 が続々と流入しました。警察は朝鮮人を検束し、中仙道を通って群馬県方面 へ送りました。彼らが県北にさしかかった4日夜を中心に、自警団と群衆に 襲われる事件が起こりました。 犠牲者は、 熊谷57名、 本庄88名、 神保原 42名、県内全体では200名余にのぼりました。民衆は朝鮮人を収容する 警察署を襲い、本庄では軍隊の力で押さえたほどでした。

↑ 10월 22일 『東京日日新聞』
← 11월 2일 『東京日日新聞』

각 신문은 사이타마현이 군(郡)을 통해 그 밑의 관할행정구역에 “불령선인폭동”을 이첩했기 때문에 자경단에 의한 조선인 학살을 더 확대시켰다고 보도했다.
요시노 사쿠조(吉野作造)『圧迫と虐殺』원고(도쿄대학 메이지신문잡지문고소장)
잡지 가이조사(改造社)의 의뢰로 관, 군의 책임과 희생자 조사에 대해 글을 썼지만 공표를 금지당했다. “현내 행정구역의 당국자들은 재향군인, 소방대, 청년당 등와 일치협력하여 경계”하라고 지시한 사이타마현의 이첩도 수록되어 있다.

吉野作造「圧迫と虐殺」原稿(東京大学 明治新聞雑 誌文庫所蔵)。改造社の依頼で、官・軍の責任や犠牲 者調査を執筆したが、公表差し止めになった。埼玉県 の「町村当局者は、在郷軍人・消防隊・青年団などと 一致協力して警戒」を指示した移牒も収録されている。

종(비상시나 시각을 알리는 종)이 마구 울려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학살했다.
증언 진보바라 야마시타 키요시(神保原 山下清 당시 소방단원)
4일 저녁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화재를 알리는 종이 마구 울렸습니다. 혼죠의 유치장에 수용되어 있던 조선인 노무자들을 현 밖으로 내보내기 위해 지나가고 있었죠…현 경계 쪽에서 그쪽(군마현)이 조선인들을 인수하지 않고 도로 되돌려 보낸다는 정보를 듣고는 잡화상 앞에 있던 나뭇가지 다발을 끌어 내어 쌓아 올렸습니다. 그리고 트럭을 멈춰 세웠어요, 2대였죠. 종이 울렸기 때문에 모두들 모여 들었는데 네 마을의 소방단원 전원과 그 밖의 사람들도 있었으니까 꽤 많았습니다. 종이 마구 울렸을 때 파출소 순사부장이 필사적으로 말렸지만 오히려 모인 사람들에게 쫓겨나 달아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트럭이 멈추자마자 나무다발을 던지면서 나무 막대기를 들고 때렸어요. 순사부장도 도망가 버렸고 운전수도 얼굴이 피범벅이 되어 도망갔어요, 그 당시 혼죠의 바바(馬場)라고 하는 신문기자가 서서 말렸지만 소용없었습니다.

진보라마:군마에 조선인들을 보내려 했지만 보내지 못하고 되돌아 오는 트럭을 폭도화한 군중들이 습격했다.

증언은 간토대진재60주년 조선인희생자조사추도사업실행위원회 편 『かくされていた歴史』에서 작성.

요시노 사쿠조(吉野作造)『圧迫と虐殺』원고(도쿄대학 메이지신문잡지문고소장)
잡지 가이조사(改造社)의 의뢰로 관, 군의 책임과 희생자 조사에 대해 글을 썼지만 공표를 금지당했다. “현내 행정구역의 당국자들은 재향군인, 소방대, 청년당 등와 일치협력하여 경계”하라고 지시한 사이타마현의 이첩도 수록되어 있다.

神保原
半鐘が乱打され大勢が集まり虐殺した 証言 神保原 山下清(当時消防団員)「四日の夕方だったと思いますね、消防の 半鐘が乱打されました。本庄の留置場に収 容されていた朝鮮人の労務者を県外に送る ために通ったのですね。…県境から先方が 引き取らないで引き返して来るという情報 がとんだんで、荒物屋の前にあった粗朶を 引っ張り出して、それを積み上げたんです。 そしてトラックを止めたんです。二台でしたね。半鐘が鳴ったから皆が駆けつけたんですが、四ヶ村の消防が全部とその他にもいま したから大変な人数でした。半鐘が乱打さ れた時、派出所の巡査部長が必死で止めたんですが、かえって皆にやられて逃げ出してしまいました。それで止まると同時に粗 朶を投げる、粗朶の棒を持って殴る。 巡査部長も逃げちゃったし、運転手も顔 中血だらけで逃げました。その当時本庄の 馬場という新聞記者が立って止めたんだ が、駄目だったんだね」

神保原:群馬に朝鮮人を送ろうとして引き渡せず、戻るトラックを暴徒化した群衆が襲った。

証言は、関東大震災六十周年朝鮮人犠牲者調査追悼事業実行委員会編『かくされていた歴史』より。


학살은 도쿄와 요코하마로부터 시작되었다

虐殺は東京・横浜から始まった

군마현에서는 도쿄 방면에서 오는 피난민들을 통해 “불령선인이 불을 지르고 폭탄을 던졌다”등의 유언비어가 퍼졌는데 신문도 그 유언비어를 그대로 보도했습니다. 후지오카(藤岡)경찰서에서는 자갈채집과 행상을 하는 조선인들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구류하고 있었습니다. 5일 인근의 민중 약 2000명이 경찰서를 습격하여 저항하지 못하는 조선인들을 죽창과 일본도 등으로 참살했습니다. 경찰서는 다음날도 습격 당해 조선인 17명이 경찰서 안에서 살해당했습니다. 군마현 경찰은 37명을 가해자로 검거했습니다만, 지방법원, 항소원, 대법원 순으로 심리가 진행되어 가는 가운데 실형을 받은 사람은 단 2명(징역 3년)에 그쳤습니다. 다카자키(高崎)시에서도 구라카노쵸(倉賀野町)순사주재소에서 보호 중이던 조선인 청년이 민중들에게 살해당했습니다.

群馬県では、東京方面からの避難民から「不逞鮮人が放火し、爆弾を投げた」などの流言が拡がり、新聞も 流言をそのまま報道しました。藤岡警察署では、砂利採取や行商の朝鮮人を保護名目で拘留していました。5日に周辺の民衆約2000名が警察署を襲い、無抵抗の朝鮮人を竹槍・日本刀などで惨殺しました。警察 署は翌日も襲われ、朝鮮人17名が警察署の中で殺害されました。群馬県警は37名を加害者として検挙し ましたが、地裁・控訴院・大審院と審理が進行する中で、実刑は2人(懲役3年)だけとなりました。高崎市でも、倉賀野町巡査駐在所に保護中の朝鮮人青年が民衆により殺害されています。

후지오카 사건을 보도하는 10월 21일자『東京日日新聞』. 대부분의 희생자들이 그 지역에서 일하던 조선인이었기 때문인지 이름이 기재되어 있다.
藤岡事件を報道する10 月21 日『東京日日 新聞』。犠牲者の多くが、地元で働いていた朝 鮮人だったためか、氏名がわかっている。
마에바시(前橋)지방법원의 후지오카 사건 판결문(이노우에 테루오(猪上輝雄)씨 소장). 실형판결은 제1심 25명, 항소심 9명, 상고심 2명으로 정상참작되었다.
前橋地裁の藤岡事件判決文(猪上輝雄氏所蔵)。実刑 判決は、第一審25 名、控訴審9 名、上告審は2 名と、情状酌量された。
근거 없는 “불령선인침입”을 큰 제목으로 내건 9월 4일자『上毛新聞』
。』聞新毛上『日4 月9 、るげ掲をし出見大の」入侵人鮮逞不「いなの拠根